2014년 5월 27일 화요일

nepal, 그림 같은 나라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져 보이는 nagarkot 트랙킹. 저 뒤에 보이는 하얀색이 히말라야 산맥이다.
네팔은 도착하자마자 상쾌한 공기와 같이 우릴 맞아 주었다.
특히 나에게는 네팔은 오아시스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인도에서 네팔로 출발하기 전에 
오랜만에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어서인지
(인도는 힌두교 국가라서 소고기를 파는 데가 별로 없다)
식중독에 걸려서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너무 고생을 하고
네팔에 도착해서까지도 계속 속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내 위장은 무쇠라고 생각했는데, 다 착각이었다)

공항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이 쫙 펼쳐져있었다.
공기마저 상쾌하고 시원했다.
(알고보니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공기는 인도보다 훨씬 안좋다고 한다)

카트만두는 관광객이 매우 많은 곳이라서 그런지
인도에 도착했을 때보다 문화적 충격이 좀 덜했다.

첫 몇일동안 우리는 카트만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특히 유명한 곳이 나가르코트(nagarkot) 트랙킹인데,
이 트랙킹 코스의 전망대는 히말리야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명소라고 한다.

트랙킹 입구에는 관광명소 답게 예쁜 스파와 호텔도 보였다.
나중에 꼭 가족과 함께 가보고 싶었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이상하게 내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네팔에서 찍은 사진은 모두 핸드폰으로 찍고 약간의 수정을 거친 것들이다. 






nagarkot에서 맞은 일몰 (photo by Kanoa David)
우리는 또 카트만두에 있는 가장 큰 템플(이름은 까먹음ㅠㅠ)에도 갔었다.



















이렇게 몇 일간 구경을 하고, 
"beauty for ashes"라는 단체를 방문하게 되었다.

"beauty for ashes"는 성매매를 당했던 여성들에게
여러 가지 액세서리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직접 팔아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NGO이다.

미국인 부부가 살던 아름다운 2층 주택을 빌려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서 재고정리라던지 상표를 붙이는 등 자잘한 일을 도왔다.

그리고 제품을 구경했는데
시중에 내 놓아도 경쟁력 있을 만큼 질도 좋고 값도 저렴해서 
나와 우리 팀 사람들도 몇 개 구매했다.

그 곳에서 만난 여성들은
모두 이제는 성매매로부터 벗어나 가족도 꾸리고 
다른 꿈을 찾아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beauty for ashes"는 이렇게 사회적 약자에게 정말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단체이다.

또, home of hope(희망의 집)이라는 고아원도 갔다.
그 곳에는 12명의 아이들이 네팔의 여러 지역에서 왔는데,
고아원를 운영하고 있는 한 부부가 열 두 아이의 부모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도 아이들에게 너무 큰 사랑을 받았다.
그냥 내가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작은 포옹에도 너무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home of hope에서 만난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니카와.

카트만두에서 한 주를 보낸 뒤, 
우리는 차로 유명한 "일람"이라는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우리는 버스로 꼬박 22시간을 이동했다.
그 것도 보호턱도 턱없이 부족하고 바로 옆에 낭떠러지가 있는  
산 속 도로를 꾸불꾸불 돌아서.

엉덩이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옆 좌석에는 닭이 꼬꼬댁 울고
사람이 바닥에 누워서 가기도 했다.

그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22시간을 보낸 뒤,
아름다운 일람에 도착했다.

일람에서 우리는 한 학교에서 머물며
3주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교 페인트칠도 했다.

그 3주동안 나는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그 도전은 바로 영상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 편입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길고 긴 과정 끝에
인터넷도 잘 안 잡히는 네팔의 한 산골에서
부랴부랴 지원서를 넣었다.

거기다 일람에 머무는 동안
네팔 교육의 부정의에 대해 다루는 짧은 영상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내가 마지막 프로듀싱과정의 지휘를 맡게 되어
이틀동안 열심히 눈알이 빠지게 편집도 했다.
빡센 일정이었지만 영상을 만드는 동안 즐거웠고
좋은 결과물도 얻은 보람있는 경험이었다.

일람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치트완"이라는 지역에 들렸다.
"치트완 국립공원"은 코끼리를 타고 사파리를 관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우리도 탔다. 코끼리.
말할 것도 없이 너무 재미있었다. 


네팔에서 인도보다 더 오래 있었지만
크게 기억에 남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꼭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사람들이 항상 상냥한 웃음을 띄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특히 네팔에는 동양인처럼 생긴 사람들이 많아서
더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나의 짧지만 길었던 
3개월 동안의 인도, 네팔 봉사 여행기 끝!

2014년 5월 24일 토요일

india, 굿바이 캘커타

캘커타에서의 마지막 몇 일.

우리는 힌두교에서 죽음과 파괴의 여신인 
칼리의 신전, 칼리가트에 갔다.
칼리의 신전은 마더테레사 하우스 중 하나인 
칼리가트 바로 옆 (말그대로)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길 건너편에는 캘커타에서 가장 큰
red light district(집창촌)도 존재한다.

죽음의 여신 칼리. 손에 사람 목을 들고 있는 모습이 섬뜩하다.
캘커타는 죽음의 신 칼리에게 바쳐진 도시이다.
그래서 칼리 신전에서는 주기적으로 염소의 목을 쳐내는 의식도 이루어진다.
더 충격적인 것은, 최근에 한 소녀를 산 제물로 바치는 의식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것도 소녀 부모님의 동의 하에.

이 것만 봐도 캘커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칼리를 두려워하고 
칼리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중 몇 명은 의식이 이루어지는 칼리 신전 안까지 다녀왔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칼리의 형상에 가까이 가기 위해
서로를 할퀴고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바닥에는 피로 얼룩져 있었고 악취가 가득했다고 한다.
정말 카오스가 따로 없다.

캘커타가 메인 도시인 웨스트 벵갈 주는 
전체가 칼리를 숭배한다.
힌두교 특성 상 3천 3백만이 넘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힌두교도들의 대부분은 다수의 신을 섬긴다.
개인의 신 혹은 가족의 신도 있을 정도로 분산되어 있다.

반면 웨스트 뱅갈, 특히 캘커타는
죽음의 신 칼리에 집중되어 있다.

캘커타는 인도에서도 가장 빈부격차가 심하고 가난한 사람이 득실대며
인도 사람들마저 가기 싫어할 만큼 어두운 도시인 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존경하는 한 사진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계를 돌아다녀 봤지만 캘커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darkest place on earth)이었다."

그 말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캘커타에 있는 동안 매일매일이
놀라움과 지침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낯선 나라에서 온 나를
웃음으로 맞아주고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어두움이 가득했던 땅 캘커타도
내 마음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캘커타에서의 마지막 몇 일동안 
서커스와 이슬람 사원 모스크에서 담은 사진들.


























india, 마더 테레사 하우스

인도에서의 마지막 봉사를 위해 우리팀이 찾아간 곳은
캘커타에서 가장 유명한 Mother Teresa House이었다.
인도에 가기 전부터 우리 모두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 너무 가고 싶어했었는데
드디어 캘커타에 도착한 지 근 한 달만에 그 유명한 곳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야 한다.
세계 각국에서 봉사자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오리엔테이션이 제공된다.

나는 대다수가 미국인으로 이루어진 우리팀과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한국어그룹 대신 영어그룹에 앉아 있었는데,
한국어 그룹에 앉아 계시는 한국인 봉사자분들을 보고 
머나먼 인도 땅에서 조국의 동포를 본 탓인지
나도 모르게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고 그 곳에 끼고 싶었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구나)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는 봉사할 수 있는 곳이 총 다섯 곳이 있는데,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명을 듣고 자신이 봉사하고 싶은 곳을 선택하면 된다.

우리 팀은 Shanti Dan(정신지체 여성을 돌보는 곳)과 
Kali Ghat(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곳)를 선택했다.
오리엔테이션 후 봉사할 곳을 선택하면 이렇게 봉사증과 펜던트를 준다. 이걸 받고 너무 자랑스러워서 사진으로 남겼다.  :P

마더테레사 하우스에서의 봉사 첫 날,
우리는 새벽 다섯시에 호스텔에서 나서 5시 반에 그 곳에 도착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모든 봉사자들과 수녀님들이 함께 미사를 드린다.
미사 참석은 필수가 아니지만 정말 많은 봉사자들이 참석해 항상 북적인다.
마더 테레사가 미사를 드렸던 바로 그 곳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 온 봉사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록 미사를 드려본 적이 없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헷갈리긴 했지만...

미사가 끝난 뒤, 모두 함께 아침을 먹는다.
아침 식사는 식빵 한 조각, 바나나, 그리고 chai(차이)!
(잠깐 설명하자면 인도에서 정말 지겹도록 마신 차이는 '차'를 의미하며, 
우리나라나 미국의 커피전문점에서 파는 차이티와는 차원이 다르게 맛있다!
홍차를 우유와 함께 다양한 향신료를 넣어 냄비에 끓여마신다. 
인도 사람들은 하루에 10번 이상 마실 정도로 차이는 그들의 생활의 큰 일부이다.
인도에서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차이를 마시고 있고
차이 장사꾼의 "차이! 차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침 식사를 한 뒤, Shanti Dan으로 이동했다.
Shanti Dan은 정신지체가 있는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을 보살피는 곳이다.
1층은 어린 아이들로, 2층은 성인 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첫 날엔 1층에서, 둘째 날엔 2층에서 일했다.

Shanti Dan에서 일한 날,
나는 진정한 의미의 "섬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마음대로 움직이고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봉사자들이 모두 도와줘야 한다.

아침에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휠체어를 끌고 다니며 산책을 시켜주기도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직접 밥을 떠서 먹여준다. 

밥을 먹이는 일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얼굴을 움직이고 입을 벌렸다 다무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은
밥을 제대로 입에 담고 있거나 삼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따라서 흘린 음식을 다 닦아주고 음식을 제대로 삼킬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먹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밥을 먹고 나면
아이들이 깨끗이 씻을 시간이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 아이들은 데리고 화장실을 가기도 한다.
이 또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집중력과 정성을 들여서 바닥에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이 곳에서 오전 반나절만 일했는데도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나니 몸이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서 만난 홍콩에서 온 한 여성은
2년동안 이 곳에서 매일매일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수년 전 shanti dan에서 단기 봉사를 했는데,
홍콩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이 곳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비록 사람들의 도움을 항상 필요로 하지만
이 곳의 아이들은 사랑이 넘친다.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언티! 언티!"하며 따라다니고
꼭 안기거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shanti dan에서 보낸 첫 날,
여러모로 미숙해서 아이들에게 도움은 커녕
오히려 불편만 끼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오히려 마음은 더 힐링이 된 것 같았다.

둘째 날은 성인 여성이 있는 2층에서 봉사를 했다.
2층에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이
traumatic experience,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경험으로
후천적으로 정신지체를 얻은 사람들이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엄마나 할머니 뻘 되시는 
나보다 훨씬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나를 보더니 "언티! 언티!"하면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발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랬는데
알고 보니 그 분들은 봉사자들의 발에 키스하는 인사를 하면서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곳에서 나는
남편에게 심한 학대를 받고 몸에 칼자국이 가득한 여성을 만났다.
팔에 난 상처를 가리키면서 벵갈리어로 뭐라뭐라 하길래
거기서 오래 일한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남편에게 당한 이야기를 해 주는 거라고 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내가 그 곳에서 만난 여성들이 대부분
사연이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분명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옆에 있어주고 함께 산책도 하고
밥도 같이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 누구보다 사랑이 많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성들과 보낸 
shanti dan에서의 시간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날은 kali ghat에서 봉사했다.
kali ghat는 마더테레사가 죽기 직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라고 한다.

칼리가트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1952년에 문을 연 임종의 집 '칼리가트'는  
원래 무슬림의 죽음의 여신 칼리의 신전이었다.  
캘커타의 대표적 빈민가이자 사창가인 이곳은
길가에서 노숙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방글라데시 및 뱅골 주의 모든 유민들이 몰려드는 캘커타는
총 인구 천만 명의 10분의 1인 약 백만 명 이상이 집 없이 거리에서 살아간다.
칼리 신전 앞에서 죽기 직전의 여자 환자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 조용히 임종을 지키던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더러운 도랑 속에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안락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보살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지어진 집이 칼리가트, 임종의 집이다."
{마더테레사 111展 : 위로의 샘 p.74}

임종의 집인 만큼 kali ghat는 들어가자마자
엄숙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환자의 대부분이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침대마다 돌아가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그들은 나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대화가 그다지 깊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는 몇 개의 벵갈리 단어들을 섞어서
몸짓발짓으로 이야기했다.
막상 나에게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폭포수같이 쏟아낼 때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밖에 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침대에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들이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안아 주자
쑥스럽게 씩 웃는 모습을 보면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언어의 장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탁월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수녀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그곳에는 
지치지 않는 지극한 사랑이 남아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아니 고난 받고 핍박 받는 수천 수만이 
예수님이 사랑으로 보살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더테레사 111展 : 위로의 샘 p.5}

Mother Teresa (1910-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