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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4일 토요일

india, 굿바이 캘커타

캘커타에서의 마지막 몇 일.

우리는 힌두교에서 죽음과 파괴의 여신인 
칼리의 신전, 칼리가트에 갔다.
칼리의 신전은 마더테레사 하우스 중 하나인 
칼리가트 바로 옆 (말그대로)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길 건너편에는 캘커타에서 가장 큰
red light district(집창촌)도 존재한다.

죽음의 여신 칼리. 손에 사람 목을 들고 있는 모습이 섬뜩하다.
캘커타는 죽음의 신 칼리에게 바쳐진 도시이다.
그래서 칼리 신전에서는 주기적으로 염소의 목을 쳐내는 의식도 이루어진다.
더 충격적인 것은, 최근에 한 소녀를 산 제물로 바치는 의식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것도 소녀 부모님의 동의 하에.

이 것만 봐도 캘커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칼리를 두려워하고 
칼리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중 몇 명은 의식이 이루어지는 칼리 신전 안까지 다녀왔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칼리의 형상에 가까이 가기 위해
서로를 할퀴고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바닥에는 피로 얼룩져 있었고 악취가 가득했다고 한다.
정말 카오스가 따로 없다.

캘커타가 메인 도시인 웨스트 벵갈 주는 
전체가 칼리를 숭배한다.
힌두교 특성 상 3천 3백만이 넘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힌두교도들의 대부분은 다수의 신을 섬긴다.
개인의 신 혹은 가족의 신도 있을 정도로 분산되어 있다.

반면 웨스트 뱅갈, 특히 캘커타는
죽음의 신 칼리에 집중되어 있다.

캘커타는 인도에서도 가장 빈부격차가 심하고 가난한 사람이 득실대며
인도 사람들마저 가기 싫어할 만큼 어두운 도시인 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존경하는 한 사진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계를 돌아다녀 봤지만 캘커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darkest place on earth)이었다."

그 말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캘커타에 있는 동안 매일매일이
놀라움과 지침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낯선 나라에서 온 나를
웃음으로 맞아주고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어두움이 가득했던 땅 캘커타도
내 마음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캘커타에서의 마지막 몇 일동안 
서커스와 이슬람 사원 모스크에서 담은 사진들.


























india, 마더 테레사 하우스

인도에서의 마지막 봉사를 위해 우리팀이 찾아간 곳은
캘커타에서 가장 유명한 Mother Teresa House이었다.
인도에 가기 전부터 우리 모두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 너무 가고 싶어했었는데
드디어 캘커타에 도착한 지 근 한 달만에 그 유명한 곳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야 한다.
세계 각국에서 봉사자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오리엔테이션이 제공된다.

나는 대다수가 미국인으로 이루어진 우리팀과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한국어그룹 대신 영어그룹에 앉아 있었는데,
한국어 그룹에 앉아 계시는 한국인 봉사자분들을 보고 
머나먼 인도 땅에서 조국의 동포를 본 탓인지
나도 모르게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고 그 곳에 끼고 싶었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구나)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는 봉사할 수 있는 곳이 총 다섯 곳이 있는데,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명을 듣고 자신이 봉사하고 싶은 곳을 선택하면 된다.

우리 팀은 Shanti Dan(정신지체 여성을 돌보는 곳)과 
Kali Ghat(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곳)를 선택했다.
오리엔테이션 후 봉사할 곳을 선택하면 이렇게 봉사증과 펜던트를 준다. 이걸 받고 너무 자랑스러워서 사진으로 남겼다.  :P

마더테레사 하우스에서의 봉사 첫 날,
우리는 새벽 다섯시에 호스텔에서 나서 5시 반에 그 곳에 도착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모든 봉사자들과 수녀님들이 함께 미사를 드린다.
미사 참석은 필수가 아니지만 정말 많은 봉사자들이 참석해 항상 북적인다.
마더 테레사가 미사를 드렸던 바로 그 곳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 온 봉사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록 미사를 드려본 적이 없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헷갈리긴 했지만...

미사가 끝난 뒤, 모두 함께 아침을 먹는다.
아침 식사는 식빵 한 조각, 바나나, 그리고 chai(차이)!
(잠깐 설명하자면 인도에서 정말 지겹도록 마신 차이는 '차'를 의미하며, 
우리나라나 미국의 커피전문점에서 파는 차이티와는 차원이 다르게 맛있다!
홍차를 우유와 함께 다양한 향신료를 넣어 냄비에 끓여마신다. 
인도 사람들은 하루에 10번 이상 마실 정도로 차이는 그들의 생활의 큰 일부이다.
인도에서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차이를 마시고 있고
차이 장사꾼의 "차이! 차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침 식사를 한 뒤, Shanti Dan으로 이동했다.
Shanti Dan은 정신지체가 있는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을 보살피는 곳이다.
1층은 어린 아이들로, 2층은 성인 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첫 날엔 1층에서, 둘째 날엔 2층에서 일했다.

Shanti Dan에서 일한 날,
나는 진정한 의미의 "섬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마음대로 움직이고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봉사자들이 모두 도와줘야 한다.

아침에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휠체어를 끌고 다니며 산책을 시켜주기도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직접 밥을 떠서 먹여준다. 

밥을 먹이는 일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얼굴을 움직이고 입을 벌렸다 다무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은
밥을 제대로 입에 담고 있거나 삼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따라서 흘린 음식을 다 닦아주고 음식을 제대로 삼킬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먹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밥을 먹고 나면
아이들이 깨끗이 씻을 시간이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 아이들은 데리고 화장실을 가기도 한다.
이 또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집중력과 정성을 들여서 바닥에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이 곳에서 오전 반나절만 일했는데도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나니 몸이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서 만난 홍콩에서 온 한 여성은
2년동안 이 곳에서 매일매일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수년 전 shanti dan에서 단기 봉사를 했는데,
홍콩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이 곳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비록 사람들의 도움을 항상 필요로 하지만
이 곳의 아이들은 사랑이 넘친다.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언티! 언티!"하며 따라다니고
꼭 안기거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shanti dan에서 보낸 첫 날,
여러모로 미숙해서 아이들에게 도움은 커녕
오히려 불편만 끼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오히려 마음은 더 힐링이 된 것 같았다.

둘째 날은 성인 여성이 있는 2층에서 봉사를 했다.
2층에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이
traumatic experience,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경험으로
후천적으로 정신지체를 얻은 사람들이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엄마나 할머니 뻘 되시는 
나보다 훨씬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나를 보더니 "언티! 언티!"하면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발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랬는데
알고 보니 그 분들은 봉사자들의 발에 키스하는 인사를 하면서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곳에서 나는
남편에게 심한 학대를 받고 몸에 칼자국이 가득한 여성을 만났다.
팔에 난 상처를 가리키면서 벵갈리어로 뭐라뭐라 하길래
거기서 오래 일한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남편에게 당한 이야기를 해 주는 거라고 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내가 그 곳에서 만난 여성들이 대부분
사연이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분명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옆에 있어주고 함께 산책도 하고
밥도 같이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 누구보다 사랑이 많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성들과 보낸 
shanti dan에서의 시간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날은 kali ghat에서 봉사했다.
kali ghat는 마더테레사가 죽기 직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라고 한다.

칼리가트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1952년에 문을 연 임종의 집 '칼리가트'는  
원래 무슬림의 죽음의 여신 칼리의 신전이었다.  
캘커타의 대표적 빈민가이자 사창가인 이곳은
길가에서 노숙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방글라데시 및 뱅골 주의 모든 유민들이 몰려드는 캘커타는
총 인구 천만 명의 10분의 1인 약 백만 명 이상이 집 없이 거리에서 살아간다.
칼리 신전 앞에서 죽기 직전의 여자 환자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 조용히 임종을 지키던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더러운 도랑 속에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안락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보살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지어진 집이 칼리가트, 임종의 집이다."
{마더테레사 111展 : 위로의 샘 p.74}

임종의 집인 만큼 kali ghat는 들어가자마자
엄숙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환자의 대부분이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침대마다 돌아가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그들은 나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대화가 그다지 깊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는 몇 개의 벵갈리 단어들을 섞어서
몸짓발짓으로 이야기했다.
막상 나에게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폭포수같이 쏟아낼 때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밖에 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침대에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들이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안아 주자
쑥스럽게 씩 웃는 모습을 보면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언어의 장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탁월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수녀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그곳에는 
지치지 않는 지극한 사랑이 남아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아니 고난 받고 핍박 받는 수천 수만이 
예수님이 사랑으로 보살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더테레사 111展 : 위로의 샘 p.5}

Mother Teresa (1910-1997)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india, 사람들 II

King's Kids
킹즈키즈는 내가 일했던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다.
그 이유는 아마 그 곳에서 만난 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킹스키즈의 아이들은 나의 마음 속에 특별하게 남아있다.
king's kids는 street kids 즉, 길거리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곳이다.
그 곳에서 킹스키즈를 운영하고 있는 로샤와 함께 사는 아이들도 있고
부모님과 함께 길거리에서 살면서 낮 시간에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람쥐같은 쪼그만 아이들로 시끌벅적한 이 곳의 하루 일과는
아이들을 씻기는 것 부터 시작된다.
밤새도록 길거리를 맨발로 뛰어다니며 
흙먼지와 매연을 온 몸에 뒤집어 쓴 아이들을
깨끗이 씻기고 빨아놓은 옷을 입히면 첫 일과가 끝난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침부터 꺄르르대며 요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아이들을 한 데 모아
씻기고 옷까지 입히다 보면 진이 쏙 빠지지만 
뽀송뽀송한 아이들을 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율동을 하며 동요를 부르고
우리가 준비한 연극도 보여주고 이야기도 들려주고난 뒤
아이들과 함께 색칠공부도 하고 블럭쌓기도 하며 
신나게 놀다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조그만 아이들이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겨있는 음식을
코딱지만한 손으로 싹싹 긁어 먹는 것을 보면
(인도는 음식을 손으로 먹는 문화가 있다)
그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밥을 먹고 나면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로샤와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은 2층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아이들은 다시 길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포장되지 않은, 차가 슝슝 다니는 길 위에서
맨발로 뛰어놀며 엄마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나는 이 때까지 길거리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는데 길가에 마치 포장마차같이 천막이 쳐져있고
사람들이 요리를 하고 그 옆에 평상 같은 곳 위에서 밥을 먹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평상이나 요리를 할 수 있는 곳도 없이 
바닥에서 천 하나를 깔아 놓고 생활하고 잠을 자는 가족도 있었다.

내가 king's kids에서 본 너무나 해맑고
웃음과 장난끼가 가득한 순수한 아이들이
이런 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구나
그때서야 좀 더 와닿았다.






아이들을 보며 난생 처음으로
입양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말로는
나중에 결혼하면 입양해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왜 입양을 하고, 진짜로 하고 싶기는 한 건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킹즈키즈에서 짧게나마 시간을 보내면서
봉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아이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물 받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일매일 아이들을 볼 생각에 설레이고
아이들과 함께 놀 때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주머니에 넣어서 한국에 다시 데려가고 싶을 만큼
너무 사랑스러웠다.

킹스키즈를 떠나던 마지막날,
내가 가장 정이 많이 들었던 한 아이가
나에게 달려들어 안기고 뽀뽀하며 활짝 웃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었다.

내가 앞으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겠지만
마음으로 자식을 낳고 사랑하게 된다면
이런 마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크게 될 아이들에게
내가 그 누구보다 큰 사랑을 알게 해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india, 사람들 I

인도에 도착한 뒤 거의 2주가 지나서야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간 곳은 Life Connection이라는 단체로
기차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낮에는 학교처럼 운영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첫 날은 봉사는 커녕 그 단체 근처에도 못 가보고
기차역과 그 주변을 몇 시간동안 뱅뱅 돌기만했다.
Life Connection에서 나온 컨택이 데리고 가는대로
아무말 없이 따라가다보니 갔던 곳을 또 가고 
익숙한 풍경이 계속 보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일부러 시간을 떼우기 위해 기차역 주변을 멤돌았던 것이었다.

이유를 추측해본 결과,
그 날 봉사하기로 한 팀이 이중으로 예약이 되어 있어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큰 무례로 생각하는 인도 문화 특성상
우리팀에게 나오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이곳저곳 견학을 시켜주고 데리고 다니며 시간을 떼웠던 것 같다.

아무튼 첫 날부터 두 시간 가량 
인도에서 제일 붐비는 역 중 하나라는 하우라(howrah)역을 구경하고
그 주변의 갠지스강까지 볼 수 있었다.

갠지스강가에 가보니 
강물로 목욕을 하고 있는 남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차역에 사는 노숙자들이 강에서 몸을 씻는 줄 알고
노숙자들이 참 많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힌두교에서는 갠지스강을 신성한 강이라고 여겨
이 물에 몸을 씻으면 면죄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경악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열심히 몸을 씻고 있는 이 갠지스강은
멀리서도 하수구냄새가 날만큼 오염된 물이다.

실제로 갠지스강은 동물이나 사람의 배설물은 물론이고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며 시체의 투기까지 이루어지기 때문에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강을
신성하다고 여기며
그 곳에서 몸을 씻는 것은 물론이고
떠가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인도 사람들을 보며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우라 기차역에 들어서니 과연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거렸다.
기차역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우리 손을 붙잡으며 구걸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도 안되어 보이는 나이의 조그만 아이들이
간절한 눈빛으로 "플리즈, 플리즈."라며 구걸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컨택이 말해주었는데,
구걸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억지로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Life Connection에 데려가서 보살피고 싶어도
부모님이 반대해서 계속 구걸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얼마나 생활고와 가난에 시달렸으면
부모가 자식에게 억지로 구걸을 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놀랍기도 했다.

역 안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한 13-4살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아이를 보고
컨택이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무슨 말을 했냐고 물어보니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주고 공부도 시켜줄테니 함께 가자고 말했는데 
싫다고 질색을 하며 도망갔다고 했다.

많은 힌두교 사회단체에서
기차역에 사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숙식을 제공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곳에서는 아이를 때리고 학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 어린 아이들이 기차역에 있다보면
함께 노숙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본드를 하는 등 악순환이 계속 될 뿐만 아니라
최악의 기차에 치어 죽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실제로 컨택이 우리를 만나러 오기 전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차 철로 위로 지나가고 있던 사람이 기차에 치여
처참하게 죽는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워낙 많이 일어나는 일이라서
기차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더니
대수롭지 않게 시체를 봉지에 담아 가고
사람들은 각자 갈길을 갔다고 했다.

Life Connection은
이렇게 위험천만한 하우라 기차역에 살며
매일매일 구걸을 하고 본드를 하며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집과 음식을 주고
교육을 시켜주는 귀중한 단체였다.


Light of Hope
다음으로 간 곳은 러블리 커플
도라와 소나탄이 운영하는 탁아소 Light of Hope.


도라와 소나탄은 캘커타 외곽의 한 작은 동네에서
낮에 일 때문에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동안
아이들을 먹이고 영어나 수학도 가르치는 작은 탁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Light of Hope이 다른 탁아소보다 조금 특별한 이유는
생활고에 시달려 엄마 아빠 둘 다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봉사단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Light of Hope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큰 도전이었다.
우리 팀은 바로 몇일 전, 
팀원 전부가 엄청난 식중독으로 몇날몇일을 고생했었다.
고열에 시달리고 30분에 한 번씩 화장실에 드나들며
몇 일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끙끙 앓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매일 아침 한시간 반에 걸쳐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오토(오토바이 택시 같은 개념)를 타고 십 분 간 또 걸어서 가야 했기 때문에
매일 아침 버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매우 간절히 기도했었다.

아무튼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니
너무나 귀엽고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언티, 언티" (인도에서는 아이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를 이렇게 부른다. 
때로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나를 "언티"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라며 내 다리를 붙잡고 깔깔대는 모습에 에너지가 불끈불끈 솟아났다.








Light of Hope에서 일주일 동안 일을 했는데
아이들과 함께 놀고 영어도 가르쳐주고
사진도 찍어주다보면 하루가 벌써 끝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light of hope 출근(?)하는 길에 항상 우리를 반겨줬던 아기염소
light of hope 가는 길.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였다.


india, 도시에서 벗어나다!

인도에 도착한 첫 날부터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우리 팀은 총 12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인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입안에 통증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고열에 시달리며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리더가 그 친구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병원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핸드폰 플래쉬로 입 안을 들여다 보는 등
너무나 열악해 여기서는 도저히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그 친구는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원래 우리 팀은 캘커타에서 몇 일을 보내고 바로 
오리샤라는 지역으로 이동해
그 곳에서 열흘 간 일을 하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팀원 한 명을 집을 보내고
몇 일동안 기차 티켓을 구하지 못해
매일매일 새벽부터 기차역에서 줄을 서는 등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지 열흘이 지나서야 겨우 오리샤로 이동하게 되었다.

인도의 기차에서 나는 또다른 컬쳐쇼크를 겪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날 자정에 떠나는 기차를 탔다.
밤새도록 이동하는 기차여서 침대가 있는 칸에 타게 되었는데
들어가자마자 냄새가 진동을 했다.

잠깐 추신 설명을 하자면 인도 기차 화장실은 푸세식이고
구멍이 바로 기찻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찻길은 물론이고 기차 안도 화장실 냄새로 진동을 한다.
(WOW!)

어쨌든 기차 안에는 벽마다 세 개의 침대가 층층이 있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내 맞은 편에는 2-30대 처럼 보이는 인도 남자 두 명이 앉았는데,
백인 3명과 동양인이 떡하니 앉아있는게 신기했는지
서로 계속 속닥속닥 힐끔힐끔댔다.

잠깐 딴 소리를 하자면,
인도 남자들끼리는 손도 잡고 연인 같은 스킨십을 하는 게
문화적으로 매우 보편적이다.
실제로 거리에서 손을 잡고 다니는 남자들은 물론이고
서로의 귀를 만지는 등 알콩달콩한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적잖이 볼 수 있었다.
인도 문화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신기하다.

오리샤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아이들.
사진기를 보고 엄청 신기해했다.
아무튼 참 신기하고 쇼킹했던 기차 관찰을 마치고
침대를 펴고 잠을 청했다.
피곤해서 그랬는지 그 불편한 침대 위에서 곯아떨어졌다.
6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오리샤에 도착했다.


사진기를 보더니 연 날리다 말고 포즈를 취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참 사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너무 예쁜 색의 사리를 입고 머리에 바구니를 두 개나 진 채 아이까지 안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불교 성전 앞. 잘은 모르겠지만 악기 연주자로 추정된다.
오리샤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대부분
그 지역에서 오랜 시간 선교활동을 해오신 분들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팀이 오리샤에 오는 첫 국제 팀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중 그 지역 베이스의 리더인
바브너라는 한 여성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 그 지역에 일어난 기독교 핍박 때
아버지를 잃고 여동생 또한 병으로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 지역을 섬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섬겨오고 있다고 했다.

그 곳에서 일하는 단 한 명도 넉넉하고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핍박을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등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팀은 "hope through hardship (고통 끝의 희망)"이라는
인터뷰 시리즈를 만들기로 했다.


"hope though hardship"은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인도와 네팔에 있는 머물었던 3개월동안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많이 불평하고 
남을 돌아보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hope though hardship" 시리즈는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다.







오리샤는 휴양지라 그런지 어딜가든 밝은 색깔로 가득차 너무 예뻤다.
손님을 기다리는 작은 이발소 주인
작은 매점



우리는 인도의 휴양지 오리샤에서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열흘을 보낸 뒤
다시 캘커타로  향했다.